2014년 3월 20일 목요일

'비폭력의 나라' 인도, 성폭력 국가로 낙인 찍힌 까닭은?

2012년 버스 집단 성폭행 등 잇단 충격적 사건으로 시끌
"문화현상보단 개별적 범죄"
인구 10만명 당 성폭행 1.8건 선진국이나 한국보다 적어
서방 언론 편향 보도도 영향
가부장 문화 강하게 남아있는 델리의 성폭력은 위험 수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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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9월 13일 판사는 네 명의 피고에게 교수형을 선고했다. 법정 밖에서 그 소식을 들은 군중들은 환호성을 올렸다. 사형을 선고 받은 이들은 노선버스로 오인하고 남자친구와 함께 탑승한 한 젊은 여성을 달리는 전세버스에서 집단 성폭행해 죽음에 이르게 한 용서받지 못할 자들이었다. 2012년 12월 16일 밤 인도 수도 델리에서 일어난 일이다.

중범죄를 저지른 여섯 명의 범인 중 한 명인 버스기사는 이미 구치소에서 목을 매 자살했고(살해당했다는 주장도 있다), 유일한 미성년자는 법정최고형인 3년의 소년원 송치처분을 받았다. 그리고 남은 네 명이 살인죄 등을 적용 받아 이날 형을 언도 받은 것이다.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의 끔찍한 범죄가 발생한 그날 밤에서 사형판결이 나오기까진 딱 9개월이 걸렸다. 인도의 사법체계에서 보기 드문 급행판결이었다. 국내외의 관심이 집중된 덕분이었다.

버스에서 일어난 충격적인 사건

사건이 알려지자 흉악한 범죄와 여성을 보호하지 못한 정부를 비판하는 시위와 항의집회가 수도를 비롯한 전국에서 벌어졌다. 경찰은 분노한 시민들의 집회와 항의가 과격해지자 최루가스와 물대포를 쏘았고, 집회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막기 위해 부분적인 계엄과 지하철 운행까지 막았다. 곳곳에서 침묵시위와 촛불모임도 이어졌다.

곧 다가온 2013 새해는 우울하게 시작됐다. 새해맞이 정부행사는 물론, 호텔과 클럽에서 열릴 예정인 사적 모임도 줄줄이 취소됐다. 엄격한 법집행과 여성의 안전보장을 요구하는 움직임은 여러 형태로 지속되었다. 해외에서도 충격적인 범죄행위를 비난하고 피해자에게 애도를 표시하는 목소리가 컸다. 비인간적인 범죄와 마지막까지 싸운 피해자에게 '용감한 여성상'도 추서됐다. 한국에서도 이 사건은 한동안 언론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렇게 1년을 넘기는 동안 인도에서 많은 것이 바뀌었다. 지방정부들은 여성의 안전을 보장하는 조치를 속속 발표했다. 성범죄전담부서를 만들었고, 피해여성의 편의를 위해 여성경찰관을 배치했다. 성폭력을 중범죄로 다루고, 신속하게 처리하겠다는 약속도 나왔다. 성폭행의 형량을 최대 20년까지 늘리는 개정안이 통과되었고, 피해자가 사망하거나 식물인간상태가 되면 가해자를 사형에 처하도록 처벌도 강화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결과는 많은 인도인이 여성의 안전과 위상을 재인식하게 된 점이다.

인도는 성폭력이 많은 나라?

이제 인도는 여성의 안전지대가 되었을까? 그렇진 않다. 크고 작은 성범죄가 지금도 대륙의 여기저기에서 일어나고 불미스런 뉴스가 외신을 타고 종종 전해진다. 인도를 전공한 인연으로 지난 1년 간 인도의 성범죄와 관련하여 많은 질문을 받았다. 인도에 여행이나 출장을 가는 여성을 둔 가족들은 인도가 위험하지 않느냐고 걱정했다. 그들은 인도의 어떤 문화적 요인이 성폭력을 빈발하게 하는가, 왜 성폭행이 전염병처럼 유행하는가를 궁금하게 여긴다.

인도는 '지구상에서 여성에게 가장 위험한 나라인가'라는 질문에 쉽게 답하기는 어렵다. 통계는 참고사항이지만, 인도에서 수치로 드러나는 인구 대비 성범죄율은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다. 유엔마약범죄사무소의 통계를 보면, 2010년 인구 10만 명당 성폭행은 인도가 1.8건으로 앞에서 세 번째인 한국(36.9건)에 비해 훨씬 적다. 물론 인도의 인구가 많으니 절대적인 발생건수는 한국을 앞지른다. 수치와 다르게 인도에서 성범죄가 빈발한다고 느끼는 것은 언론의 보도가 많아서 더 많이 알려지기 때문이다.

공식적인 성범죄율은 미국과 영국 등 이른바 선진국이 더 높다. 그러나 성폭행이 많다고 미국 여행을 고민하는 사람은 없다. 한국 언론이 영국에서 발생한 성폭행사건을 자주 다루지도 않는다. 인도의 성폭력이 부각되는 것은 편견의 탓도 있다. 범죄는 후진국에서 많이 생기고 그래서 인도는 뭔가 위험하다는 오래된 인식이 저변에 있는 것이다. 델리의 집단성폭행사건이 그런 인상을 더 짙게 만들었다.

성비 불균형, 경제 불평등

인도의 성폭행 사건은 문화현상이나 전염병이라기보다 유형이 다른 개별범죄로 봐야 한다. 성적으로 보수적인 사회에서 소외된 남성이 많은 것이 주요 원인이다. 돈이 없어 짝을 찾지 못하거나 여성이 부족해서 결혼하지 못하는 남성들이 많다. 인도는 1861년부터 2011년까지 10년마다 치러진 인구조사에서 늘 여성인구가 부족했다. 2011년에도 10년 전처럼 여성이 4,000만명 가량 적었다. 이런 인구구조에서는 성적으로 좌절한 사람들이 성범죄의 유혹에 취약하다고 지목된다.

사회경제적으로 취약한 사람이 많은 수도에서 성범죄가 많이 일어나는 건 그래서다. 2010년 조사에서 델리는 성희롱과 성추행 등 여성상대범죄가 가장 많은 도시로 꼽혔다. 응답한 델리 거주 여성의 60%가 공적장소에서 성적 위협을 느낀다고 답했다. 수도에서 7년 간 유학한 나도 그랬다. 배우지 못하고 기술이 없어서 일자리를 얻지 못한 청년들이 많이 살고, 가진 자에 대한 그들의 상대적 박탈감이 성범죄의 한 원인으로 작용한다. 2012년 집단성폭행을 저지른 범인들도 슬럼에 살거나 직업이 없는 청년들이었다.

가부장 문화도 한몫

가부장 문화와 전통도 성범죄에 한몫을 한다. 비폭력으로 유명한 인도에서 여성에게 폭력적인 성향을 보이는 것이다. 남아선호사상과 여성인구의 부족, 여성의 낮은 교육률, 높은 여아사망률, 결혼지참금문제로 희생되는 여성, 매 맞는 여성의 높은 비율, 홀어미에 대한 부당한 대우, 여성에게 불리한 사회진출 등 여전히 여성에 대한 차별이 많다. 이러한 남성우월주의와 여성경시가 성적 폭력으로 연결되기 십상이다.

지난 2월 동부지역의 20세 부족민여성이 같은 마을에 사는 십여 명의 남자들에게 집단성폭행을 당한 사건이 그렇다. 성적인 집단유린은 이웃마을의 다른 종교를 믿는 남성과 만나는 여성을 응징하기 위해 마을 원로들이 내린 판결의 결과였다. 아직도 여성의 몸이 가족과 집단에 속하고, 그래서 언제든지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남성중심문화는 12세 여아가 두 명의 경찰관에게 성폭행을 당한 사건에서도 잘 드러난다. 경찰관들은 아이와 합의한 성관계라고 주장했고, 판사는 어린 피해자에게 적극적으로 반항했냐고 물었다. 경찰의 보복이 무서운 이웃들은 피해자의 품행이 조신하지 않았다고 증언해 가해자들이 무죄판결을 받도록 도왔다. 지금도 성폭행 피해자들은 자신의 행실이 나쁘지 않다는 걸 증명해야 한다. 가해자의 형량이 많지 않고 처벌 비율이 낮은 것도 가부장 문화의 산물이다.

남성위주로 생산되고 유포되는 성관련물이 성범죄를 야기한다는 점은 인도도 마찬가지다. 오늘날 누구나 쉽게 접하는 성과 관련된 각종 동영상, 게임, 포르노영화, 야한 잡지, 볼리우드영화의 선정적인 장면은 성에 대한 남성의 인식을 왜곡시킨다. 특히 외국여성들이 프리섹스를 즐긴다고 오해하고 집적대는 인도 남성이 적지 않다.

가장 안전해야 할 수도에서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가 많은 것도 가부장 문화 탓이다. 델리는 결혼지참금과 관련된 범죄가 연간 1,000여 건이 넘을 정도다. 이유는 파키스탄과 분단될 때 이주한 피난민들과 각 지방에서 상경한 이질적 집단들이 모여 사는 탓에 '힘'과 '강한 남자'를 추구하는 성향이 짙기 때문이다. 통계를 보면 수도 델리처럼 가부장 문화가 강한 지역일수록 여성인구의 비율이 낮고 성범죄율이 높다.

'눈에는 눈'보다 여성을 존중해야

요즘은 인도에서도 여성들의 사회참여가 크게 늘었다. 뭄바이 등 대도시에서는 '하의실종' 옷차림을 한 여성들도 만날 수 있다. 일부 남성들은 성희롱과 성폭력이 많아진 이유를 여성들의 선정적인 차림과 사회활동 증가에서 찾으며 오히려 피해자들에게 책임을 전가한다. 인도에서는 남성의 욕망을 당연시하는 문화를 여성을 존중하는 문화로 바꾸는 일이 시급하다는 걸 알게 한다.

아무리 많은 걸 말하고 많은 법을 만들어도 인도에서 성폭력이 근절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 많은 남성들이 다 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성폭행 사건에 분노하는 대규모 시위나 집회에 인도 남성들의 참여가 많은 것은 희망적인 징후다. 그런 외침이 모여 역사가 바뀌지 않았는가. 우리도 남의 눈의 티끌만 언급하기보다 우리 안의 들보를 봐야 한다. 사랑하는 내 어머니, 내 아내, 내 딸, 내 누이는 다 여성이다. 세상의 절반인 그들이 안전해야 좋은 세상인 건 분명하다.
<기사 출처 :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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